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Repubblica Sociale Italiana'''

나치 독일괴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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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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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 1945년
표어
Per l'onore d'Italia
(이탈리아의 영광을 위해)
국가
조비네차
위치
이탈리아 반도 북부
수도
로마 (명목상)
살로 (사실상)
정치체제
일당제[2], 이탈리아 파시즘
국가원수
베니토 무솔리니
언어
이탈리아어
통화
리라(₤)
성립 이전
이탈리아 왕국
멸망 이후
이탈리아 왕국
1. 개요
2. 역사
3. 군대
4. 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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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괴뢰국. 이탈리아 왕국에서 쫒겨난 베니토 무솔리니아돌프 히틀러의 도움을 받아 세운 북이탈리아의 괴뢰 정권이다. 약칭은 RSI로 보통 행정부 소재지인 살로[3]의 이름을 따서 '''살로 공화국'''이라고 부르고 파시스트 이탈리아라고도 한다.

2. 역사


1943년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으로 미영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자 국가 파시스트당 내부의 반무솔리니파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전쟁 책임을 전가하고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에 합의, 무솔리니는 축출되고 육군 원수 출신인 피에트로 바돌리오(Pietro Badoglio)가 이끈 신 행정부에 의해 전범으로 체포되어 감금되었고 바돌리아 정부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지만, 항복 직후 바돌리오 정부를 의심하고 있던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를 점령한 후 무솔리니를 구출[4]해서 1943년 9월 23일 북이탈리아에 설립했다.
먼저 무솔리니는 자신을 배신했던 사위와 반파시스트주의자 에밀리오 데 보노 등 17명을 처형한다. 자신의 사위도 처형시켰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군 장성도 처형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고 일부 군 장성들이 살로 공화국에 대한 협조를 거부했다가 처형당한다.[5] [6] 그리고 무솔리니는 군 구축과 정비의 노력들을 하였으나, 나치 독일의 괴뢰국이었기 때문에 트리에스테이스트리아쥐트티롤 지방 등 일부 지역을 나치 독일에 강탈당했다.
노조 활동과 파업도 금지되었으나, 무솔리니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위해 노동자의 지지를 받을수 있는 정책들이 통과하도록 추진하였다. 하지만 그래봤자 괴뢰국일 뿐 별다른 역할은 하지 못했다. 나치 독일의 지원과 보호가 없이는 결코 존속하기 불가능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들은 제대로 추진되지 않았고, 이탈리아의 파르티잔 유격대나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들에만 이용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남북으로 길다란 이탈리아의 지형 덕분에 독일 국방군의 알베르트 케셀링이 지휘하는 독일군은 구스타프 라인, 베른하르트 라인, 발바라 라인, 아레초 라인, 고딕 라인 등 겹겹이 늘어선 산맥 방어선들을 따라 방어전을 전개하여 남부 이탈리아 지역에 있는 연합군들을 묶어두어 전선을 유지시켜 연합군의 진격이 지지부진했기에 이 허술해 보였던 국가가 의외로 오래 버티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군과 살로 공화국군은 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킬수는 있지만 막아내고 반격을 할 역량은 부족했고, 독일의 패망 직전인 1945년 4월 25일에 국방장관 로돌포 그라치아니가 '이탈리아의 독일군 항복이 임박했다.'는 급보를 무솔리니에게 전하고 북부로 도망친다. 무솔리니는 즉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독일과의 추축동맹을 파기한다.'고 알리려 했었지만, 이미 뒷북이었다. 그 날 저녁, 베니토 무솔리니는 전범 재판을 대비해 자신의 전범 혐의가 써져 있는 서류들을 챙기고 이탈리아 탈출을 시도한다. 이로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정부는 사실상 붕괴된다.[7] 4월 27일 중립국 스위스로 탈출하려던 무솔리니와 그의 일행 6명은 유격대원들의 검문을 받게 되어 체포, 즉결 총살을 당한다. 총살당한 무솔리니와 애인 클라라 페타치를 비롯한 그의 일행들은 이어서 밀라노 광장 주유소에 거꾸로 매달린채로 전시되었다.
이틀 뒤 독일의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Heinrich von Vietinghoff) 장군이 카세르타에서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의 항복에 서명하자, RSI의 국방장관 그라치아니도 항복했다. 항복은 5월 2일부터 발효됨으로써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은 완전히 멸망, 도로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3.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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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장관으로 로돌포 그라치아니가 임명되면서 국가 안보 의용 민병대를 다시 창설하고, 사실상 이들이 군대로 쓰였다. 물론 검은 셔츠단들 빼고 몇몇 민병대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연합군과의 전투를 치를 수 있는 능력조차도 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파르티잔 유격대 및 게릴라 토벌을 할 수 있는 형편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괴뢰 정권이긴 했지만 독자적인 공군 부대도 있었다. 살로 공화국의 공군성 차관은 당시 '''중령'''이었던 에르네스토 보토(Ernesto Botto)가 맡았는데, 스페인 내전에 참전해서 부상으로 한쪽 다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공군에 남아 활동해서 당시 이탈리아 공군 내에서 인망이 높았다. 그래서 에르네스토 보토가 살로의 공군 수뇌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탈리아 공군 조종사들 중 살로 측에 합류한 인사들도 꽤 있었다. 게다가 에르네스토 보토는 살로 공군은 독일군과는 독립적인 명령 및 조직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고 이를 위해 아예 독일 공군의 총수인 헤르만 괴링에게 직접 찾아가서 담판을 지어 이를 성사시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당연히 독일군 측과 마찰이 생겼고, 결국 독일 측의 압력을 견디다 못한 보토는 1944년 차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4. 미디어에서


살로 공화국을 배경으로 해서 나온 소설 기반 영화가 바로 희대의 문제작 살로 소돔의 120일이다.[8]
또한 영화 파시스트도 배경이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과 이탈리아 왕국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전투를 벌이던 1944년이다.
[1] 로마 제국의 깃발과 매우 비슷하다.[2] 국가 파시스트당의 잔당들이 창당한 공화 파시스트당이 일당 독재를 펼쳤다.[3]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주에 있는 소도시로, 현재는 인구 1만명 남짓이다.[4] 오토 슈코르체니문서 참조[5] 대표적인것이 바로 이니고 캄피오니.[6] 진짜로 존경했다는 게 아니라 처칠의 일화 중에 처칠의 사위가 처칠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어보자 처칠이 무솔리니라고 대답했는데 사위가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아니냐고 되묻자, '''걔는 지 사위마저 총살시킨 놈이었다'''고(...) 말한 것이었다. 사위가 마음에 안 들어서 한 농담일 뿐이었다.[7] 이탈리아는 4윌 25일을 해방의 날(festa della liberazione)이라는 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8] 원작 소설은 근세 프랑스가 배경이다. 사실 영화도 엄밀하게 말하면 살로 공화국이 배경은 될 수 있어도 주무대는 아니다. 영화는 스위스의 어느 저택을 무대로 진행되며, 살로 공화국에 대한 언급은 그 저택의 주인들이 살로 공화국의 고위 인사들이라는 것과 '죽음을 유예받고 살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그 대사 한 마디 뿐이다. 차라리 살로 공화국을 무대로 설정한 영화는 '로렌초의 밤'이 더 가깝다.